일기장

20210906 전주경기전 어진박물관

꿈연이 2021. 9. 1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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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날 만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선 배가고파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다행히 경기전에 도착했을 땐 비가 좀 자자 들었다.

 

경기전 어진 박물관 입장권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경기전 건립과 중건 

태조어진을 봉안한 전주의 정전을 경기전이라고 창한 것은 1442년(세종24)이다.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성이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소실 되어, 1614년(광해군6년)에 중건되었다.

1676년(숙종2)에는 정전 동편 전주사고 자리에 별전이 건립되었다.

1919년 일제의 의해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이 철거되고 일본인 소학교가 건립되었으며, 1937년 별전이 철거되었다.

1997년에는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 자리에 있던 중앙초등학교가 이전되고, 2004년 부속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 형식은 다포계 건물로 소박함을 추구하는 유교건축에서 사용한 예가 흔치 않다.

 

경기전 안내도
정전

경기전 정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일자집으로 어란 전면에 1칸의 각을 덧대어 지은 정자각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전 안에는 태조어진이 모셔져 있다

용실

용실은 제사에 사용할 음식을 민드는 방앗간이다. 디딜방아와 절구를 두고 경기전 제례에 사용되는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경겅하고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곳이다.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재료의 준비를 위하여 조과소나 전사청과 인접해 있어야 하며 주변에 불결한 시설이 없어야 한다.

전사청

전사청은 국가의 제사에 쓸 재수 준비와 제사상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으로 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는 벼슬아치의 사무를 행하면서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조병청

조병청은 떡이나 유밀과, 다식 등의 제사 음식을 만들과 보관하는 장소이다.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진전의 찬실도에는 중박계, 붉은 산자, 흰 산자, 다식, 과일, 각색떡, 탕 등을 사용한다고 되어있다.

 

비가와서 그런지 관광객들이 적었다.  어진박물관은 경기전 안쪽으로 이동하면 있다

 

어진박물관

어진박물관은 경기전 입장권이 있으면 입구에서 큐알체크와 소독만 하고 들어가면 된다

1층에는 어진실1 지하1층에는 가마실 역사실 어진실2로 이루어져 있다

1층으로 입장하고 지하1층으로 나오는 구조로 되어있다.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맞이해 2010년11월6일에 개관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317호인 태조어진을 비롯해 태조어진을 봉안할 때 사용된 각종 가마유물 및 경기전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태조어진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말한다. 그 중 태종어진은 건국자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조성왕조를 상징한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태조어진이 26축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태조어진은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과 청색의 곤룡포, 백옥대와 흑화를 착용한 전신상에 가슴과 어깨에는 왕을 상징하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이 그려져 있다. 1872년 모사본이지만 조선초의 어진 제작기법을 담고 있다. 곤룡포도 역대 임금들이 홍룡포를 입은 것에 반해 태조는 청룡포를 입고 있다.

태조는 기록에 의하면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큰 귀가 아주 특이하다고 하였다. 태조어진을 보면 넓은 광대뼈에 눈과 입이 작으며 양쪽 귀가 큰 모습이다. 오른쪽 눈썹 위에는 사마귀까지 그려져 있어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어진 제작 방법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로 어용, 수용, 진용, 성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어진제작은 도사 추사 모사의 3종류로 나눠진다.

도사는 국왕 생존시에 그린 것이며, 추사는 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경우이다. 모사는 기존의 어진을 본 떠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진 제작 과정은 먼저 이를 담당할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원이 정해지면 밑그림을 그리고 배채기법으로 채색을 한다. 어진이 다 그려지면 표구를 하고 표제를 쓴 후 진전에 봉안 한다.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를 택하여 진행하였다. 

털끝 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초상화가 아니라고 했고, 초상화에 겉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어진을 비롯해 한국초상화 제작기법에서 독특한 것은 배채법으로 화면의 뒷면에서 안료를 칠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하면 뒷면에 칠해진 안료가 얇은 비단 화면을 통해 색채를 드러내는 만큼 은은하고 깊은 색감을 준다.

(초상화에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야 한다니...  왕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화공들이 알 수 있었을까?? 참 어려운 일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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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어진과 역대왕들의 어진제작

태조에서 철종대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어진 뿐이다. 세종 정조 어진은 남아 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표준영정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거의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조선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 왕대에 그렸다.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되었지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보존해 두었다.

(정은궐 소설 홍천기를 읽으면 이 부분이 소설 속에 나와 있다)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각 되지 못하였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 제작여부를 알 수 없다. 또 조선중기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

숙종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정조 역시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 

순조의 세자였던 익종은 22세에 사망했음에도 예진을 8본이나 제작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이나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

 

내가 어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소설 홍천기를 읽고 나서다. 현재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홍천기와는 약간의 스토리 차이가 있지만 요즘 읽었던 소설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다. 그래서 전주 경기전 어진 박물관에 오게 되었다. 비가와서 관람하는 데 불편 했지만 기억에 남는 관람이였다.

 

 

비오는 경기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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